휴게실
‘이상한 나라에 살던 앨리스가 어느 날 거울을 보다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원더한 세상과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자신을 바라본다. 구멍 밖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 앨리스는 문 앞에서 주저하기 시작한다.’
경주 황남동 어느 집 골목에서 마주했던 기묘한 색감의
공간은 무언가 비현실적인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저 대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한 나라 또는 원더랜드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곳의 앨리스는 반짝거리는 동화 속 세상과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늙어버린 모습일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환상 속에
남아 있을지, 아니면 자신과 함께 쇠락해가는 문밖 세상으로 나설지, 앨리스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었다.
글, 사진 | 안은희
리코플러스 대표(akkanee@empas.com)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위엄있게 마주하기
얼마 전 어느 토크쇼에서 가수 이효리가 30대를 대표하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을 선택했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자 연예인이 자신의 나이 듦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았기에 그녀의 소신 있는
마인드가 보기 좋았다. 자신의 나이는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이다. 내 나이를 긍정하지 못함은 그동안 살아온 내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비록 잘 관리하고 아껴주지 못한 자신의 몸과 마음에 가끔씩 미안해지기는 하지만, 부족한대로 그 또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다. 나를
부정하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최근에 건축가 정기용 선생님에 대한
다큐영화 「말하는 건축가」를 보면서, 자신을 마주하고 세상을 마주하는 사람의 떠나가는 뒷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이가 들수록
‘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자신과 인간,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조금 더 성숙해진 후에 ‘위엄있게’ 죽음을
마주하고 싶다는 그의 고백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삶 옆에 항상 붙어있는 죽음을 우리 곁에 두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는 거울 속 내 얼굴의
주름을 마주볼 수 있는 용기에서부터 시작될는지도 모르겠다. 위엄있게, 나이 듦과 죽음을 마주한다면 지금 내게 주어진 생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해지고 감사해질는지. 그래서 정기용 선생님의 마지막 유언은 고맙다는 말이었나 보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하늘도 고맙고,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햇살도 고맙습니다.”
원더한 건축가들
건축가나 디자이너들은 환상을 먹고 사는 종(種)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항상 물질을 통해 물질
너머를 꿈꾼다. 그들은 자신들이 디자인한 건축이나 제품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받아들여지고 수용되기를 원한다. 이 집의 이 공간은 이렇게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건축가들의 바람은 그들 자신의 욕망인 경우가 많다. 그 집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거주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함께 맞추어가지 않는 한, 그들의 환상은 현실 속에서 실현되기 어렵다. 진정 원더한 건축가들이란 자신의 원더랜드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꿈과 환상을 계속 부딪치고 반성하고 수정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정기용 선생님도 자신이 꿈꾸는
건축과 사회에 대한 원더한 열정으로 가득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집중했겠지만, 점차 그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비록 세상을 원더랜드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의 원더랜드는 어느새 세상과 거의 구분되지 않을 만큼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의 건축의 마지막
화두는 마음이 함께 따라 움직이는 ‘감응(感應)’이었다. 그는 건축가의 욕망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건축형태에 대한 집착을 지우고, 그 자리에
사람들의 삶을 조직하여 건축으로 응답하고자 노력해왔다. 소신 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의 꿈을 공유하게 만든다.
‘아집’과 ‘소신’의 차이는 아마도 원더랜드와 현실, 또는 자신과 타인들 사이의 경계면을 닫아두느냐 유연하게 열어두느냐에서부터 생겨날 것이다.
‘맥도날드 할머니’와 ‘아르헨티나 할머니’, 그리고 앨리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맥도날드 할머니’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속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아집과 소신의 경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든다. 맥도날드 할머니는 젊은 시절 외무부에 근무했던
인텔리였는데 현재는 교회, 커피숍, 맥도날드를 전전하며 노숙을 하고 계신다. 아직까지도 자신을 사랑해 줄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며 영자신문을
읽다가 맥도날드 매장에서 쪼그려 앉아 주무신다는 기사를 읽으며, 그분의 선택에 대해 판단할 수는 없지만 심정적으로는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에서 멈춰계셨다. 그 세계 안에서의 환상이 그녀를 버티게 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힘인
듯 보였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소설 초반부에는 동네 어귀에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살고 있는 마귀할멈 같은 고립된 사람으로
그려졌다. 허름한 건물에서 세상과 동떨어져 누구보다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집에 들어서서 그녀와 마주해보면 그녀의
기묘하고 따뜻한 세계에 동화되어 자신도 모르게 낯설고 단단한 마음들이 하나 둘 풀어진다. 그녀는 자신의 원더랜드 안에 머물러 있지만 언제나 문을
열어 놓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세계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원더랜드를 섣불리 재단할 수도 없고 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의 꿈과 환상을 존중한다는 의미와 같다. 그러나 원더랜드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과 계속 밖의 세상과 마주하고
교류하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과연 앨리스는 정말로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까. 부디 앨리스가 늙어버린 자신을 소중하게
껴안고, 더 늦기 전에 문을 열고 구멍 밖 세상으로 나설 수 있기를, 그럴 수 있는 용기를 내보길 응원해본다. 나와 닮은, 어쩌면 내 자신이었을
앨리스가 한 걸음 내딛기를, 그렇게 내딛은 세상을 향해 고맙다고 진심의 말을 전할 수 있길 소망해본다.
*‘동네’를 돌아다니다보면,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색’이 있었다. 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허름하고 좁은 골목, 남의 집 대문과 같은 장면들은 우리들의 눈과 귀를 머물게 한다. 우리의 눈에 의해
포착되어서 어느새 우리의 마음의 의미로 포획되어 버린 장소 이야기, color of village는 그런 장소와 장면들의
이야기이다.